긍른전력이었던 것: 다가갈게, 너의 품으로 (2025)

결말이 따뜻한 한 편의 소설 속

너와 내가 주인공이길 바랐지만

너의 행복과 슬픔, 그리고 일생을 읽는 동안

나는 등장하지 않았고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지문에 눈물만 묻혀가며

말없이 페이지를 넘길 뿐이었다

소설 속 나의 이름은 고작

'너를 앓으며 사랑했던 소년1'이었다

서덕준의 등장인물

너는 어울리지도 않게 선도부 활동을 했다. 매일 아침 일곱 시부터 여덟 시까지 정문으로 들어오는 아이들의 옷차림을 살피며 근엄하게 서 있다가 친구들이 지나가면 괜히 발을 걸어 넘어뜨리게 하며 키득키득 웃는 너였다.

종종 나는 넥타이를 빼먹고 왔다. 그러다 네가 하고 부르는 목소리에 괜히 모른 척 고개를 돌려 대답하고는 했다. 귀 끝이 붉어지는 걸 눈치채지 못한 너는 잔소리하며 늘 들고 다니는 파일에 내 이름과 학년 그리고 반을 적었다. 이렇게 벌점 쌓이면 아깝지 않아요? 그러니까 좀 챙기고 다녀요. 평소엔 잘만 하고 다니면서. 꿍얼대는 네 입술을 보다 눈이 마주치면 불경한 짓을 하다 걸린 아이처럼 후다닥 교실로 뛰어가고는 했다.

네가 별관 건물 들어오는 입구에 서 있는 주간이면 일부러 일찍 오기도 했다. 5층 끝 반이라서 다행이지,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면 네 정수리가 바쁘게 움직이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러다 가끔 네가 하늘을 보면 눈이 마주치곤 했다. 은근슬쩍 손을 흔들며 눈부시게 웃는 너를 보고 있으면 마치 우리가 청춘의 한 장면을 찍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오로지 나만의 착각으로 만들어진 비디오에 네가 새겨질 때 나는 짜릿함을 느꼈다.

유일하게 낀 검지의 반지 의미를 물었던 기억이 있었다. 검지는 주로 방향을 가리킨다고 그래서 목표를 세운 사람이 잊지 않기 위해 검지에 반지를 끼운다고, 말하는 너의 볼이 발그레해졌을 때 너는 작고 붉은 자두 같았다는 걸 알까.

어딜 가나 주목을 받는 사람이었다. 밝은 기운을 타인에게 선물해 주는 너는 주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저 너의 본성이자 태생이 그러한 걸 어찌할까. 퐁퐁 솟아나는 너의 햇살이 나에게 닿았을 때 약간 울고 싶어졌다. 나만 이 따스함을 받는 게 아니라서, 나한테만 줬으면 하는 마음에.

누군가가 너를 왜 좋아하냐고 물으면 글쎄, 라고 대답할 것 같다. 그냥, 어느 순간 네가 내 눈에 들어왔고 웃을 때 들어가는 눈 밑 보조개가, 시원하게 벌어지는 입술이, 훤칠하게 큰 키에 맞게 어울리는 교복이, 종종 보이는 개구쟁이 같은 모습이, 가끔 친구들에게 부리는 애교가, 가늘지만 투박한 손으로 피아노를 치며 흥얼거렸을 때, 너의 순간순간이 내 눈에 들어와 각인이 되었다고 하면 믿겨 질까.

어느 순간 너는 웃음이 많아졌다. 너의 행복이 곧 나의 즐거움이었기에 피식 웃으며 종종 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평소보다 더 치는 장난과 안 그래도 큰 몸을 이용해서 움직이는 몸짓이 귀여웠다. 그럴 때마다 너의 시선은 한쪽에 있었고 그러다 네 옆에 그 애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조금 속상했다. 그리고 조금 울었다.

방과 후 수업을 하나 만들어 달라고 건의했다. 노래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는 그런 방과 후 수업. 동아리를 만들기엔 너무 거창하고 한 학기 동안 잠깐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교실마다 방과 후 수업 모집 프린트를 만들어 붙였다. 효과는 좋았다. 네가 들어왔으니까. 일부러 만든 방과 후 수업에 네가 없으면 서운하지. 내 미끼에 걸려든 너는 한 학기 매주 월요일과 금요일에는 내 얼굴을 봐야만 했다.

생각보다 다재다능했다. 피아노도 칠 줄 알았다. 얇지만 투박한 손으로 피아노를 치며 흥얼거리던 너를 구석에 있는 책상에 걸터앉아 바라보았다. 너는 종종 여기에 노래 불러 달라고 했고 나는 부끄러운 척 내뺐다가 한 번씩 불러주었다. 반주가 끝나면 작게 박수 치는 너를 눈에 오래 담고 싶었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너는 반갑다는 듯 다가왔다. 마치 강아지였다면 길고 풍성한 꼬리가 휘휘 저어지는 모양이었을 것이다. 다가와서 방과 후 이야기도 하고, 아침에 눈이 마주치는 이야기도 하고, 점심에 관련된 이야기도 하고, 너의 팔이 나의 어깨를 끌어안고 이야기할 때면 나는 너의 눈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고개를 돌리면 제법 가까운 거리에서 눈을 마주치고 있다는 게, 그렇게 부끄러웠다.

이별 소식에 너는 살이 조금 빠졌다. 어떻게 너를 찰 수가 있을까. 그 여자애는 필시 너의 자양분을 빨아먹고 버린 것일 테다. 안 그러면 네가 이렇게 안 웃는 모습을 보일 리가 없었으니까. 다들 힘내라며 한 소리씩 했지만 나는 굳이 다독여주지 않았다. 그냥 네가 감정 때문에 조금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위안일 때가 있었다. 지금의 나처럼.

너는 내 모든 것에 관심이 없겠지. 그러니 지금 이 상황에서 웃고만 있겠지. 내가 어떤 심정인지도 모르고. 방과 후 수업이 모두 끝났다. 너를 볼 수 있는 작은 접점 하나가 사라진 날인데 너는 뭐가 그리 좋은지 하하 호호 웃으며 박수를 쳐대고 있었다. 심통 난 나를 빤히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드는 네가 정말, 미웠다.

여름에 피어난 너는 바람이 차가워질수록 여물어져 갔다. 날카로워진 하관과 뚜렷해지는 눈매가 좀 더 나를 야만적인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다. 너를 훔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런 내가 등신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밤이 늘어갈수록 너는 서서히 나의 책장을 덮어주려는 듯 서서히 멀어져 갔다. 간간이 하던 인사도, 이제는 소용 없어졌다.

너는 졸업식에 찾아왔다. 아는 사람들 때문에 와서 늦게 내리는 눈을 겨우 뭉쳐 교복에 던지며 마무리를 짓는 모습에 너는 아직도 소년이구나, 푸른 빛이 감돌아 영원히 잠식할 것 같은 그런 소년이구나, 너를 청춘이라고 부르는구나, 내 손에 들린 꽃다발 같은 너구나, 잠시 그리 생각했다. 마지막의 너를 적는다고 한다면 그저, 청춘이라고 적고 싶었다.

책은 덮였다. 추억이 되었다. 네가 추억이 될 줄은 상상도 안 해봤는데, 그렇게 됐다. 선선해진 가을 날씨가 변덕을 부렸다. 한 방울씩 내리는 비에 다급히 우산을 샀다. 건널목의 파란 불을 기다리고 있는데 하도 많이 봐서 닳디 닳은 느낌의 네가 맞은편에 서 있었다.

조금 놀랐다. 더 커진 키와 고작 일 년 남짓 보지 않았다고 남자 냄새가 나는 너는 통화를 하며 나와 같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파란불이 켜지고 서로 걷는 발걸음이 가까워졌다. 그렇게 스치는 사람 중 하나인 내가 너를 영원히 잊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 얼마나 놀랄까, 어버버 대는 네 얼굴과 눈빛이 그려져 작게 웃었다.

10년, 딱 10년이 지났다. 아직도 너는 나에게 청춘이고 꽃다발이자 푸른 나무 옆에 선 선도부인 네가 가슴 한쪽에 박혀있다. 나는 너를 교복 입은 모습밖에 기억하지 못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소소하게 행복했다. 그래, 언제 너의 교복 입은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아주 어린, 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잊지 못하는 작은 추억이 된 네가, 첫사랑이라는 소설책에 너를 앓으며 사랑했던 소년 1이라도 될 수 있어서 기뻤다. 물론 지은이 나, 엮은 이 나, 제작자 나이지만.

사랑했던 소년 1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저 소설책에 너를 흠모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티를 내기에 아주 좋은 명분이지 않을까. 그 생각을 하니 조금 우스웠다. 지금의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굳이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종종 떠오르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 그 끝은 늘 항상 너였기에 오늘은 여기까지 생각하고 싶어졌다.

유한별

플래이브 긍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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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Kimberely Baumbach C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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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Kimberely Baumbach C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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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b: Product Banking Analy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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